신문 칼럼

법은 왜 법 앞에 물컹해지는가?(8.28자)

푸르고운 2017. 9. 9. 20:15



    맹위를 떨치던 더위가 주춤하더니 새벽 기온이 17도 언저리가지 내려갔다. 창문을 닫고 얇은 이불을 덮었다. 세월은 그렇게 흐르고 있었고 세상은 변해가고 있다. 촛불의 힘으로, 국민의 뜻에 따라 부도덕한 정권이 퇴출되고 새 정부가 들어서서 날마다 국민들이 변화를 실감할 수 있는 조치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 가운데서 국민은 조금씩 나아지는 세상을 느끼며 내일을 기대하고 있지만, 변하지 않는 곳이 있다.

    나라의 기강과 질서를 위해 가장 엄격해야할 법원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이 민망한 진실에 가난한 국민은 오늘도 절망한다. 시내버스 기사가 하루 결산 입금에서 2,400원을 누락했다는 이유로 회사가 해고한 일이 정당하다고 법원이 판결하고 항소심도 항소를 기각했다. 버스회사는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할 수 있었고 버스기사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는 차이가 존재했다. 기사는 가난한 노동자였고 회사는 재력과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인물이 실 소유주라는 차이가 있었다.

    지난 25일, 세기의 재판이라던 삼성 이재용 부회장과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이 있었다. 박영수 특별검사는 징역 12년을 선고해달라고 했는데, 김진동 부장판사는 징역 5년을 선고했다. 5가지 혐의 부분에 대해 전부 또는 일부의 유죄를 인정하면서 형량은 구형량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날 선고의 백미(白眉)는 “삼성이 박 전 대통령에게 경영권 승계의 도움을 받기위한 ‘명시적 청탁’을 하지 않았고,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을 위한 ‘묵시적’ ‘간접적’ 청탁도 없었다고 판단한다.”는 대목이었다.

    그렇게 판단한 이유는 “이재용과 박 전 대통령의 면담이 이루어진 2015년 7월 25일은 이미 국민연금이 합병찬성 의결권을 행사해 합병이 이루어진 이후였다”는 것이다. 덧붙여 “박 전 대통령의 삼성관련 말씀자료나 안종범 수첩의 기재만으로 청탁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다만, 박 전 대통령이 삼성의 경영권 승계 작업을 인식하고 있었고 이 부회장과 삼성측이 승계 작업에 관하여 박 전 대통령의 도움을 기대하고 최순실의 승마와 동계스포츠센터 지원요구에 응했으므로 뇌물죄에 해당한다.”라고 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은 ‘대통령의 말씀자료나 안종범의 수첩에 기재된 내용만으로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라는 대목이다. 그것들이 정황증거에 불과하지만, 대통령이라는 절대권력의 힘이 미치는 범위와 그 힘을 기대하는 자가 제공하는 금품은 당연히 청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판단해야 옳지 않았나 싶다. 왜냐면 이 부회장과 대통령 사이에서 그 이상의 증거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구체적 증거를 대라고 하는 것은 처벌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특검이 433억 원의 뇌물을 준 혐의를 두었지만, 재판부는 승마지원 73억 원과 장시호의 동계스포츠 영재센터 16억 등 89억 원만 뇌물로 인정했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 출연금은 뇌물로 보지 않았다. 그 속에는 출연금을 낸 많은 기업들도 모두 뇌물죄로 처벌을 해야 한다는 이유도 포함된 듯하다. 강요에 의해서 낸 돈이라는 판단을 했다면 앞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의 강요죄는 더욱 무거워질 것이라는 전망도 가능하다.

    그날 선고가 끝나자 전국의 네티즌들이 낮은 형량에 분개하면서 ‘역시 법은 돈 가진 자의 편이다.’라고 비난하는 등 법원에 대한 원색적 성토가 끊이지 않았다. 더구나 박영수 특별검사와 특검에서 애쓴 검사들은 돈 앞에 무력한 법의 판단을 보며 허탈했을 것이다. 그나마 5년을 선고한 것도 이번에 청와대에서 찾아낸 문서들이 일부 증거로 채택되어 그만한 결과를 가져왔다니 그야말로 난해한 일이다.

    세상에 누가 이 돈은 어떤 일을 해주기로 약속하고 받았다는 영수증을 써줄 것인가? 무엇으로 대가성을 입증하라는 것인지 그야말로 특검으로서는 복장이 터질 일이다. 공무원이 받는 뇌물을 판단할 때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어도 공직자의 영향력의 범위에 있는 일이고 그 시기에 금품이 오간 사실이 있으면 뇌물이라고 간주해서 판결했던 일이 여러 차례 있었던 것으로 안다. 하물며 대통령이 그 실세 측근의 일을 지원하도록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상황에서 그 시기에 건넨 금품을 뇌물이 아니라고 판결한다면 과연 누가 뇌물죄로 처벌을 받겠는가? 삼성은 그 당시에 경영승계와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문제가 현안으로 걸려 국민연금의 동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던 시점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요모조모로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할 꼬투리를 남겨놓은 이번 판결을 두고 혹자는 ‘고도의 머리를 쓴 교묘한 판결’이라는 평가를 했다. 죄목마다 ‘유죄’이면서도 5년 이상은 선고할 수 없는, 그리고 2년 6월을 선고할 수도 있었지만, 그건 상고심에서 처리하도록 빈틈을 남겨놓은 판결이라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날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만기 출소했다. 한 전 총리에게 적용하듯 법을 적용했더라면 삼성 이재용 부회장에게 5년만 선고할 수 있었을까 생각을 해보았다. 과연 귀신도 사귈 수 있다는 돈의 위력을 실감하며 지난 주말 내내 기분이 퍽 거시기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