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벚꽃은 그리움

푸르고운 2015. 4. 8. 19:22

벚꽃은 그리움이야.

 

봄비에 한껏 기운을 차린 벚꽃이 빗방울을 이슬처럼 머금고 실바람에 하늘거린다. 해거름에 잠시 얼굴을 내민 햇살이 꽃잎 사이에 보실거리는 벚꽃 언덕에서, 문득 그녀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여고생 둘이 언덕을 오르며 뭔가 신이 나서 웃는 소리였다. 연신 떠들며 다가오는 한 학생의 목소리가 귀에 익다. 조금 통통한 얼굴이라는 느낌이 비슷할 뿐, 전혀 닮지 않은 모습인데, 말하는 억양이나 목소리가 거의 비슷했다. 아니, 어쩌면 비슷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활짝 핀 겹 벚꽃에 마음을 뺏겨 바라보며 그 옛날 아스라한 추억의 그림자를 더듬고 있던 참이어서 그렇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기쁨에 들떠 높고 맑게 종달새처럼 지저귀던 그녀를 개나리가 시들어가고 벚꽃이 만발하던 언덕에서 만났었다. 그리고 여러 해 뒤, 겹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주차장에서 흩날리는 꽃잎이 자동차 앞 유리에 드문드문 내려 붙은 사이로 그녀가 창가에서서 흔드는 슬픈 손과 눈을 보았다.

 

벚꽃은 그리움이다. 가을 잎을 떨구고 서릿바람을 견디며 꽁꽁 언 가지 위에 눈 덩이를 이고서도 벚나무는 꽃을 낼 마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봄이 오고 꽃을 시샘하는 꽃샘바람, 꽃샘추위가 엄포를 놓아도 기어이 꽃을 피워 세상에 봄이 왔음을 선포한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지만, 벚꽃은 한 주일도 채 버티지 못하고 꽃잎을 떨구어 버린다. 그 짧은 며칠을 위하여 한 해를 꼬박 기다리는 벚꽃은 오랜 그리움이 불꽃으로 타오르듯 화사하게 피었다가 사그라지고 만다. 짧은 삶을 아쉬워하지 않고 다시 필 그날을 기약한 채, 꽃샘바람에 몸을 떨다가 흙으로 돌아간다.

 

그리움은 보고 싶어 애타는 마음이다. 사랑하는 이를 보고파하는 마음, 겨울을 견디며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그리움이다. 꽃잎마다 맺혀 있던 그리움들이 하나, 둘 바람에 팔랑거리며 날려 갈 때, 내 가슴 깊은 여울에 웅크리고 있던 그리움과 아린 통증이 깨어난다. 행여 산들바람이라도 불면 꽃비가 되어 흩날리는 화편(花片)에 가슴은 무너져 내리고 나는 참을 수 없는 아픔에 혼절한다.

 

봄은 소생과 희망의 계절이지만, 그 봄소식을 전하느라 탈진한 벚꽃에게는 슬픈 이별이 준비되어 있을 뿐이다. 꽃잎이 하얗게 떠날 때면 내 그리움은 되레 짙어졌다. 그녀의 슬픈 손이 흔들릴 때, 내 눈가에 그렁거리던 눈물은 오래도록 개울이 되고 강물이 되어 가슴 속에 흘렀었다. 세월은 이제 그 강물조차 증발시켜 아픈 상념만 꽃잎에 얹혀 날려가는 데 차마 놓아버릴 수 없는 지친 그리움이여!

(20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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