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노년의 레시피

푸르고운 2015. 4. 8. 18:55

노년의 레시피

 

요양병원의 아내를 보러 갔다가 비가 온다는 예보에 쫓겨 서둘러 자전거를 몰아 집에 돌아왔다. 현관문 손잡이에 뭔가 걸려있다. ‘ㅇㅇㅇ교회라는 라벨이 붙어 있는 셀로판 봉지에 달걀 두 개가 들어있었다. 부활절 선물이 온 것이다. 보통 부활절 달걀은 붉은 색과 다른 색깔을 칠하여 예쁘게 꾸며 선물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무 칠도 치장도 없이 맨 달걀을 보니 좀 이상했다. 천주교가 아닌 개신교에서 달걀 선물을 한 것도 처음 본 일이다. 성의 없는 선물이긴 하지만, 그것도 음식이니 가지고 들어와 먹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서 소금을 준비해서 껍질을 벗겼다. 그런데 달걀을 삶아 찬물에 제대로 처리를 하지 않아 껍질에 살점이 붙어 나온다. 삶은 달걀을 까다가 이런 경우를 만나면 먹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신다. 가까스로 껍질을 벗기고 나니 움푹움푹 패이고 속껍질이 붙어 있기도 해서 모양새가 한심하다. 성의 없이 삶은 달걀을 꾸밈도 없이 그냥 주섬주섬 담아 집집이 걸어 둔 일을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과 함께 부활달걀은 내 뱃속에서 부활하지 못하고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음식을 버리는 것이 죄스러웠지만, 그걸 먹다가 체하는 것보단 나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음식은 만드는 이의 마음이 깃들어야 제맛을 낼 수 있다. 하찮은 달걀 하나라도 먹을 이의 기쁨을 생각하고 찬물에 제대로 헹구어서 속껍질과 흰자위 사이에 수분이 맺히도록 해야 껍질이 잘 벗겨져 맵시 있는 음식이 될 수 있다. 요즘 지상파나 종편(綜編) 방송에서 음식 관련 방송이 크게 늘었다. 유명 탤런트들이 직접 음식을 만들고 끼니를 해결하는 모습에 시청자들이 환호하고, 별것 아닌 재료로 멋진 음식을 만들어 내는 쉐프(chef. 주방장)의 솜씨에 감탄한다. 그러한 방송 덕분에 요리를 제대로 배우지 않은 사람들도 쉽게 음식의 조화(調和)를 이해하고 따라 하다 보면 제법 솜씨가 늘기도 한다. 나도 그들을 따라 이런저런 음식을 만들다 보니 몇 가지 먹을 만한 음식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나름대로 응용하는 재주도 생겼다. 그러면서 내가 확실하게 체득(體得)한 것은 적당히 아무렇게나 음식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세상만사가 적당히 해서 잘 되는 법이 없지만, 음식은 특히 만드는 이의 정성이 맛을 좌우한다. 이것저것 맛이 날 만한 재료를 털어 넣고 간을 맞추면 음식이 될 법하지만, 음식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먹을 음식은 먹을 이의 식성이나 기호(嗜好)와 분위기까지 살펴야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비록 달걀 두 개이지만, 예수의 부활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보내는 선물이라면 성의를 다하여 삶을 때 찬물 처리도 잘하고 모양도 꾸며서 먹기 아까울 정도의 달걀이 돼야 했었다.

 

혼자 살게 되면서 제일 고역인 일이 하루 세 끼니를 해결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딸들이 해준 반찬 한두 개와 김치로 식사를 했지만, 시일이 지나면서 딸들의 관심도 시들해지고, 그릇을 씻고 치우는 일도 귀찮아졌다. 걸핏하면 라면이나 누룽지를 끓이거나, 즉석 밥으로 김치 쪼가리를 반찬 삼아 끼니를 때웠다. 그러면서 누군가 식사 약속을 해주는 사람이 고마웠고 밥때가 되면 누군가를 불러 함께 밥 먹을 궁리를 했다. 식당에 혼자 앉아 밥을 먹는 일은 내가 무엇보다 싫어하는 일이다. 지난날 직장 생활을 할 때도 가끔 혼자 식당에 갈 일이 생기면 사무실에 전화해서 그때까지 식사하지 않은 후배들을 불러 함께 밥을 먹어야 밥이 제대로 넘어갔다. 그런데 이제 내가 음식을 해서 혼자 먹어야 하는 사정이 되었으니, 끼니가 제대로 챙겨질 리가 없었다. 그렇게 몇 해를 보내면서 몸이 많이 부실해졌다. 격렬하게 자전거를 타면서 필요한 만큼 먹질 않아 영양부족 상태가 되었다. 몸이 자꾸만 제대로 먹어야 한다고 신호를 보내왔다.

 

그러면서 내 삶에 새로운 핑곗거리가 등장했다. 음식을 맛있게 해서 먹자. 시간이 걸리고 귀찮아도 음식을 잘해서 맛있게 먹는 일도 노년을 잘 보내는 방법이다.’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남들은 할 줄 몰라서 못하는 일이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어머니 곁에서 보고 익힌 솜씨가 있지 않은가? 내게 있는 건 시간뿐인데, 음식 만들고 치우는데 시간이 든들 어쩌랴. ‘잘 먹고 죽은 귀신이 화색(和色)도 좋다.’는 옛말이 있지 않은가? 귀신에게도 화색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때부터 나는 음식 관련 방송을 챙겨보며 여러 가지 레시피(Recipe)를 구해 음식을 만들어 보기 시작했다. 방송에서 음식을 시식(試食)하는 사람들은 맛을 보며 숨이 넘어갈 듯 감탄을 연발했지만, 내가 만들어보면 그저 그런 음식도 있었고 가끔은 정말 맛있는 음식도 있었다. 더욱 어려운 일은 갖가지 음식 조미료와 소스(sauce)나 향신료가 없어서 레시피대로 만들 수 없는 일이었다. 상당기간 어려움을 겪으면서 내 음식도 조금씩 자리가 잡혀 지금은 몇 가지 즐겨 먹는 음식을 쉽게 뚝딱 만들어 음미해가며 먹는다. 고급 재료를 쓰는 음식은 못하지만, 세일기간에 저렴하게 구한 재료와 필수 향신료와 소스 등을 갖추어 식탁이 푸짐해졌다. 토마토와 쇠고기, 버섯을 넣은 스파게티 소스도 넉넉히 만들어두어 언제든 파스타를 먹을 수 있고, 여러 가지 조림과 노인에게 필요한 음식들을 언제든지 먹을 수 있어 좋다. 식빵도 굽고 머핀(muffin)이나 단팥빵, 피자나 사과파이도 굽느라 시간을 들이지만 조금씩 행복해지고 있는 느낌이다.

 

노년을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는 방법으로 나처럼 스스로 식탁을 풍성하게 만들며 시간을 들이고 그 맛을 즐기는 방법도 괜찮은 거 아닌가 싶다. 나이 들면 입맛도 제대로 느끼지 못해 맛있는 것이 없다고도 한다. 그러나 정성을 들이고 과정을 생각하며 먹으면 맛이 두 배, 세 배로 좋아진다. 거기다 맘에 드는 이와 함께라면, 그를 위하여 음식을 만드는 일부터 함께 먹는 데까지 감동과 행복이 넘쳐날 것이다. 어떤 이는 남자가 음식 따위나 하고 쪼잔하다고 핀잔을 했다. 허나, 늙은이가 사내다워 보았자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꼴불견일 뿐이다.

새봄이 왔다. 아름다운 꽃이 피고 새잎이 돋아나듯, 내게도 편하고 넉넉한 심성의 밥 벗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래서 가끔 예쁜 코에 밀가루도 묻혀주며 함께 음식을 만들고, 서로 눈을 바라보면서 식탁에 마주 앉을 수 있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저 부질없는 봄꿈이라 해도 어쩌다 한 번 그런 일이 있었으면…….

(20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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