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창은 열리지 않는 창이다. 글자 그대로 봉해진 창문, 창문은 열어젖혀 바깥공기를 안으로 들이고 밖을 내다보기 위해 만들어지는데, 봉창은 여는 기능이 없는 창이니 절반의 창문인 셈이다. 밖의 소리가 들리고 가까이서 어른거리는 형체가 있으면 밖의 상황을 짐작할 수는 있지만 명확하게 알 수 없는, 종이가 바깥세계와의 접촉을 차단한 창이다.
지금 사람들은 창문이라면 유리 창문을 생각하지만, 내가 어릴 적에는 유리창보다는 한지를 바른 창이 많았다. 대청이 있고 제법 규모가 있는 기와집이어야 미닫이와 여닫이를 갖춘 이중문을 달았고 남향에 반닫이 위로 큰 창문을 내고 살았다. 대개 2~3칸 집엔 들창문을 내거나 봉창을 내서 채광을 하는 정도였다.
창의 종류 가운데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창이 봉창이다. 봉창을 내는 가옥은 흙과 돌을 켜켜이 쌓아 외벽을 세우고, 안팎에 흙과 잘게 자른 짚을 섞어 발라 마감하는 작고 낮은 구조였다. 방 한 칸이거나, 어간을 막아 칸을 나눈 구조의 집이었다. 출입문도 작게 만들어 문살은 대나무를 갈라 겉대를 얇게 벼려서 X자로 엮어대고 그 위에 창호지를 발랐다.
봉창은 채광과 간접통풍의 효과를 위해 만들었다. 대개 집의 동쪽에 봉창을 내었는데, 아침 햇귀가 올라오기에 앞서 봉창은 희붐하게 새벽이 열리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봉창은 새벽부터 밭에 나가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을 깨우는 시계였고 자명종이었다.
“동창(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칠 아이는 여태 아니 일어나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하느냐?”라던 정철(鄭澈) 시조의 동창과는 형태가 다르지만, 비슷한 기능의 봉창이다. 일반 가옥구조에서는 동쪽으로 큰 창을 내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흔하지 않게 직사각형의 들창문을 내서 아침을 알리고 방의 채광을 돕는 용도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움막처럼 작은 집을 지어 드나드는 방문을 허리를 숙여 들어가야 하도록 작게 만들고, 네모진 문틀에 문살을 넣은 창을 내지 않은 것은 방의 외풍을 막기 위해서다. 그 시절에는 겨울에 문고리를 잡으면 손이 쩍쩍 들러붙을 만큼 추웠다. 가난 속에서 나무 문틀과 문짝을 만들 돈도 없었다. 봉창이 제격이었다.
작은 집은 흙으로 벽을 쌓고 나무 서까래를 얹어 그 사이를 새끼로 얽은 다음 짚을 섞은 흙으로 천정을 마감한 지붕위에, 짚으로 이엉을 엮어 얹은 초가는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했다. 창을 크게 내면 자연 냉난방이 흐트러지므로 채광과 환기를 위해서 북쪽에도 들창이나 봉창을 냈다. 북쪽의 봉창은 가능한 높은 위치에 만들어 채광과 환기의 효과를 거두었다.
봉창의 용도는 다양했다. 환기와 채광의 용도 이외에 외부와 연락하는 초인종의 구실도 했고, 비밀스럽게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 커뮤니케이션하는 수단도 되었다. 봉창을 두드려서 방안의 사람을 부르거나 긴급 신호를 알리기도 했고, 봉창에 그림자나 어떤 흔적이 지나가도록 하여 남몰래 신호를 보내기도 했다.
근세에 이르러서는 봉창에 작은 유리조각을 대서 밖을 내다볼 수 있게 하는 방법도 생겼다. 봉창 만 아니라 방문에도 작은 유리를 대어 발라서 밖을 내다볼 수 있게 하였는데, 그 유리를 통하여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유리 위에 커튼을 달 듯 창호지를 덮고 끝에 대나무 줄기나 잔가지를 감아 두기도 했다.
서양의 성당에 스테인드글라스가 멋을 부린 창문이라면, 우리 창호지 창문에도 국화잎이나 은행잎, 억새꽃 등을 붙이고 창호지를 발라 창에 멋을 내기도 했다. 어디서 언제인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어떤 가난한 사람의 집 봉창에 소박한 산수화가 정말 감탄할 수준으로 그려있었던 기억이 있다. 어떤 사람이 하룻밤 자고 간 일이 있었는데, 떠난 후에 보니 그림이 그려 있었다고 했다. 햇빛이 비치는 방향이나 정도에 따라 그림이 다르게 보인다고 했다. 장판도 바르지 못한 삿자리 방이 작은 그림 한 폭으로 넉넉함으로 비치던 그때 느낌이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어슴푸레하게 남아 있다.
석유가 귀하던 시절에 가난한 농촌에 가면 삿자리를 깔은 방 두 칸의 사이 벽을 뚫은 곳에 등잔을 두어 호롱불 한 개로 두 방을 밝혔다. 지금 사람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가난이었지만, 마음을 나눌 줄 알았고, 정이 흐르는 사회였다. 가난 속에서도 손님이 오면 한 끼 밥을 나누어야 마음이 편했다. 굴속처럼 어두워도 따끈한 장작불로 덥힌 삿자리 방에서 호롱불 끄름에 콧구멍이 꺼매지도록 자고 봉창의 새소리에 잠이 깨면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여닫을 수도 없고 크기도 겨우 한자 언저리의 작은 봉창은 막힌 듯했지만, 열려있던 그 시대의 소통하는 통로였다. 봉창을 기억하는 사람은 나이 많은 노인들이다. 젊은이들은 그런 창을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나간 시대의 유물이고, 가난했던 시대 농촌의 하찮은 풍경이었다. 그러나 작은 흙집에 빛과 공기를 소통시키던 그 작은 공간이 있었기에 가슴에 정을 담아 아들딸과 손자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그 창을 통해 정과 사랑을 배웠던 사람들이 살던 세상은 오늘처럼 삭막하지 않았고 돈을 위해 목숨을 걸지 않는, 사람 사는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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