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창문을 열면 손에 닿을 듯 장송(長松) 가지가 방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아이 손톱만 하던 솔방울이 작은 밤톨만큼 자랐고, 연두색 잎들은 어느새 초록으로 농도를 더해가고 있다. 3년 전 겨울, 처음 이사를 와서 창문을 열었을 때 눈에 보이는 소나무들이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소나무 해충인 솔잎혹파리에 감염되어 푸른 솔이 아니라 붉은 솔로 변했었다. 작은 원룸에 와서 답답한데, 창밖의 소나무마저 죽어가고 있으니 우울한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이런 일을 전주시가 알아야 할 것 같아 시청으로 전화를 했다. 다행히 이미 알고 있고, 나무마다 방충 처리를 했으니 내년부터는 회복될 거라고 했다. 솔잎혹파리는 어린 솔잎 밑 부분에 기생하여 영양을 빨아먹으므로 솔잎이 자라지 못해 짧고, 겨울이 되면 붉게 말라 들어 나무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소나무 해충이다.
보기 흉했던 소나무 숲은 이듬해 봄부터 조금씩 회복되어 푸른 솔의 모습을 되찾아 갔다. 해마다 붉은색이 줄어들더니, 올해는 완전한 푸른 숲으로 회복되었다. 완산칠봉 남쪽 산자락에 자리 잡은 7층 아파트의 4층에 있는 내 방은 베란다 창문을 열면 소나무 숲이 온통 방안으로 들어온다. 도시의 먼지와 악취, 소음들이 소나무 숲에 걸러져 청량하게 정화되어 향기롭다. 병마에 시달리는 환자의 고통스러운 밭은 숨, 가난과 억압에 짓눌려 사는 이들이 내뱉는 가쁜 숨, 힘겨운 삶의 일상에서 버티느라 지친 사람들이 뿜어내는 날숨도, 소나무 숲에 이르면 싱그러운 공기로 거듭난다. 그렇게 새로워진 공기는 부드럽고 향기로운 치유(治癒)의 바람이 되어 세상 속을 흐르며 힘들고 답답한 이들의 가슴 속 허파에 생명의 힘을 불어넣는다.
‘나태주’ 시인은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 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라고 말했다. 정말, 꽃 한 송이가 피면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지고, 시 한 편이 지어져 사람들의 마음을 열면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진다는 사실을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인의 마음은 삶에 찌든 평범한 이들이 느끼지 못하는 감성과 사랑을 담고 있어서, 우리에게 새로움과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소나무 숲이 우리 모두에게 주는 것도 그와 다름없다. 사철 푸른 잎으로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고, 세상의 더러움을 걸러 향기로 내뿜는다. 소나무 숲이 내 방에 들어와 지구 한 모퉁이가 청량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소나무와 편백과 떡갈나무들이 어우러진 숲의 고마움을 잊고 산다.
창밖의 소나무 숲은 겨울이면 하양 눈을 머리에 얹고 수런수런 하며 아침을 연다. 햇살이 퍼지면서 눈이 녹아내리고,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가지들이 팔을 내릴 때 쏟아지는 눈 뭉치들이 여기저기서 떨어지느라 수런거리는 것이다. 그때쯤이면 추위에 떨던 새들도 일어나, 눈에 덮여 찾기 어려운 먹이를 찾아 나선다. 다른 나무들은 잎을 모두 떨구고 한가롭게 쉬지만, 소나무는 짙푸른 잎으로 버티고 서서 몰아치는 눈발에 맞서 독야청청(獨也靑靑)의 지조를 지킨다. 소나무는 흰옷을 좋아하는 우리 민족처럼 항상 푸른 잎을 자랑하며 온갖 풍상을 겪고 있다. 높은 가지에는 숲에 사는 새들이 집을 짓기도 하고, 다람쥐와 청설모의 놀이터가 되기도 한다.
아침에 잠을 깨면 나는 창문을 열기 전에 보청기를 먼저 찾아 귀에 끼운다. 창문을 열면 푸른 숲과 함께 쏟아져 들어오는 아름다운 새소리를 듣기 위해서이다. 꿩, 박새, 참새, 까치, 때까치, 까마귀, 곤줄박이 등 그런대로 알아볼 만한 새들과 이름 모르는 새가 아침을 상쾌하게 열어준다. 봄이면 짝짓기를 하느라, 유난히 더 소리가 크고 쫓고 쫓기는 드잡이가 이어진다. 방이 북으로 창을 내고 있어 햇볕을 직접 받을 수는 없지만, 올려다보면 팔각정이 보이고, 완산칠봉 가운데 네 봉우리가 보이는 방, 이 멋지고 거대한 소나무 숲 정원이 나를 붙잡아 3년째 여기서 살고 있다. 늘 푸른 소나무와 종일 레퍼토리를 바꾸어 노래하는 산새들이 있어 외롭지 않은 작은 방이 좋다.
이제 고마운 자연의 도움으로 메말라 흔적조차 찾을 수 없던 내 정서의 씨앗들이 싹을 틔워 작은 잎을 내밀고 있다. 글쓰기로 인하여 계속된 고뇌와 방황에서 바른 자리를 잡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부지런히 물을 주고 거름을 주어 아름다운 꽃을 피워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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