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년 광복절의 자전거 여행
자전거를 타고 시골 길을 달리면, 흙냄새와 잘 삭은 거름냄새, 그리고 계절의 향기가 섞여, 피워내는 사람냄새를 맡을 수 있다. 거기에는 속임수나 권위, 불법, 탐욕 등등 사람답지 못한 인자(因子)들이 없다. 보이는 만큼 믿어도 속아 실망할 일이 없고, 느끼는 정(情)만큼 고마워하고 기뻐할 수 있어서 좋다.
나는 지난 8월 15일에 자전거를 타고 전주에서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에 있는 동학 농민혁명 기념관을 거쳐 정읍시 고부면 소재지까지 다녀왔다. 1894(갑오)년의 농민혁명이 실패한 뒤, 2 갑자의 세월이 지난 갑오년 광복절에 혁명의 의미를 새롭게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주자학을 나라의 근본이념으로 삼은 데서부터 이미 몰락을 예고하고 있었다. 글을 읽는 선비만 사람대접을 받는 사회구조는 자연스럽게 붕당(朋黨)을 이루게 했고, 권력을 잡은 무리에서는 불법과 부조리를 눈감아주는 관행이 만들어졌다. 어느 파당이든 권력을 잡았을 때, ‘우리끼리 잘 해먹는’ 전통이 이어졌다. 벼슬을 사서 근무지에 부임하면 잽싸게 본전을 뽑고, 수단을 다해 수탈해야 또 돈을 바치고 영전할 수 있었다. 기술과 과학은 선비의 일이 아니어서 상놈들이나 하는 천한 것이었으니, 나라발전이 이루어질 턱이 없었다. 죽도록 농사를 지어도 관리들의 수탈에 다 뜯겨,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목숨을 이어가는 백성들의 생활은 나아질 수 없었다.
당시 전주부(全州府) 다음의 알짜 군이었던 고부군(古阜郡)은 19개 면을 담당하는 큰 군이었다. 넓은 평야와 바다까지 낀 고부군의 물산은 풍요로웠다. 따라서 고부 군수 자리는 먹을거리가 넘치는 좋은 자리여서, 전라 감사 자리와 함께 중앙권력의 든든한 배경이 있어야 앉을 수 있는 자리였다. 조병갑(趙秉甲)은 여러 고을의 수령을 맡아오면서 악독하고 잔인하게 백성을 괴롭힌 인물로, 고부에서 걸태질을 일삼아 원망의 소리가 높이 일자, 익산 군수로 발령이 났다. 그러나 후임 군수로 여섯 사람이 연이어 발령되어도 아무도 부임하지 않았다. 중앙에 든든한 배경을 가진 조병갑이 익산에 가지 않고 계속 고부에 눌러앉아 버티고 있으니 발령은 형식적이었다. 전라 감사 김문현은 거짓 장계를 보내 조병갑을 두둔했다. 그러자 슬그머니 조병갑을 다시 고부 군수로 발령했다.
사발통문을 돌려 조병갑을 혼내주려던 전봉준을 비롯한 고부 농민들은 그가 익산으로 발령 나자 행동을 미루고 있었는데, 그가 떠나지도 않고 버티다가 다시 발령을 받아 주저앉자, 곧바로 봉기하여 고부 관아로 쳐들어갔다. 갑오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된, 갑오년 1월 10일의 이른바 ‘고부 농민봉기’였다. 농민들은 조병갑이 거두어들인 만석보 수세를 농민들에게 되돌려주고, 새로 지은 보를 허물어버렸다. 농민혁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갑오년 이전에도 농민들의 저항은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다. 관리들의 수탈은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벼슬 산 본전을 가난한 백성들의 식량을 털어 채우는 관리들에게 백성들은 절망했다. 전봉준과 동학농민혁명의 주역들은 이미 사발통문에서 조선 왕조의 끝장을 넘겨다보고 있었다. 나라의 근본인 백성들을 돌보기는커녕 수탈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왕조는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알아낸 것이다. 사발통문의 3개 행동지침 마지막 항목에 ‘전주영(全州營)을 함락하고 경사(京師)로 직향할 사’라고 했다. 전라감영을 거쳐 임금이 있는 서울로 가서, 썩은 정치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러나 있었다. 조선왕조가 공맹지도(孔孟之道)의 5백 년 꿈에서 깨어날 즈음에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일본이 왕조의 심장에 칼을 겨누고 있었고, 꿈에도 못 본 과학기술로 혼을 빼는, 서양의 여러 강한 나라들이 한반도에 침을 흘리고 있었다. 구식 무기조차 변변치 않은 군대를 두고, 잠에서 덜 깨어 몽롱한 조선 왕조는 ‘바람 앞에 놓인 등불’에 다름 아니었다.
나는 전주시 완산구 평화동에서 출발, 세내(三川)를 건너고 독배 재를 넘어, 김제시 원평(院坪) - 정읍시 태인(泰仁) - 황토현 – 고부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 이 길은 갑오년 3월에 무장(茂長)에서 일어선 농민군 중심부대가 고부를 거쳐, 황토현 싸움에서 관군을 이기고 전주성에 들어가던 승리의 길이었고, 공주 우금치 싸움에서 크게 져서 후퇴하던 농민군이 원평과 태인에서 마지막 싸움을 벌여 완전히 끝장 난 길이기도 하다. 구불구불하던 좁은 흙길이 곧고 넓게 포장되어, 옛길과는 사뭇 다른 길이 되었지만, 그날의 함성과 처절함을 느끼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왕복 1백km 넘는 거리이고, 독배 고갯길이 만만치 않은 경사여서 어려운 여행이 될 터였지만, 그 시대에 죽창을 든 농민들을 생각하면 내 처지는 호사(豪奢)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살이가 그러하듯이 자전거 여행도 힘든 오르막이 끝나면 반드시 올라온 만큼 쉽게 내려가는 길이 있다. 전주에서 출발하여 독배 고갯길 4.5km를 올라가면서 온몸이 땀에 젖었지만, 고갯마루에서부터 신바람을 내며 내려 달리는 맛은 자동차 여행에서 느낄 수 없는 짜릿함이 있었다. 내리막에서 시속 40km 이상의 속도로 자전거를 달리면, 발밑의 길 위에 떠서 나르는 듯 상쾌하다. 길도 집들도 가로수도 얼굴에 스치는 바람처럼 내 몸을 빛살처럼 뚫고 지나간다. 스치는 모든 것이 내 몸이 되고, 내 몸은 스쳐 지나간 모든 것이 되어 흩어진다.
갑오 동학농민혁명의 과정에서 가장 큰 보람은 전라도 대부분 군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농민들의 손으로 사회개혁 작업을 진행하고, 지역의 행정을 처리하는 실질적인 자치(自治)를 경험한 일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선비나 지역의 벼슬아치가 아닌 사람들이 스스로 지역의 행정과 사회정화 사업을 벌였던 일은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불과 2개월 남짓한 기간이었지만, 집강소 일을 담당했던 하층민들의 마음은 아마도 세상을 다 얻은 듯 감개무량했으리라. 농민혁명군이 일본군과 관군에 패하여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는 바람에 그들의 발자취나, 처리한 기록이 모두 사라져 아쉽다. 양반이나 관리들의 입장에서 집강소의 기록은 불쾌하고, 남기고 싶지 않은 흔적이었을 것이다. 자랑스럽고 소중한 백성들의 역사가 일제와 보수 세력에 의해서 무시되고 지워진 일은 참으로 아까운 일이다.
황토현 동학농민기념관을 돌아보고, 그들의 뜨거운 충정을 가슴 가득 담고서, 혁명이 시작되었던 정읍시 고부면을 찾아갔다. 부패한 중앙정부를 개혁해야 지방 관리의 탐욕스럽고 포악한 행동이 없어질 것이라고 미리 내다본, 전봉준의 땅을 보고 싶었다. 야트막한 고개를 세 번 넘어가 찾아간 그곳은 마치 80년대의 영화 세트에 들어선 듯 초라했다. 관공서와 공공건물을 제외하면, 거리는 좁고 집들은 낮았다. 조선의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1914년 전국의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고부군에 속했던 면을 모두 떼어내고 고부면으로 격하시켜, 지역 물산이 모이지 않도록 막았다. 조선왕조가 역적이 나온 지역의 등급을 내리고, 역적의 집을 허물고 못을 파버리듯, 일본은 반일의 본고장이 두려워 해코지한 것이다. 해방되고 정권이 몇 번이나 바뀌어, 농민혁명의 의미가 되새겨졌지만, 고부는 지금까지 일제의 해코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광복 69주년을 맞이한 지금, 일본은 다시 전쟁의 야욕을 부풀려가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 정치는 두 갑자 전의 갑오년처럼 정권에 목맨 파당 싸움과 이념 부추기기에 여념이 없다.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돌보지 않는 정치, 오로지 표를 얻기에 급급한 정치가 이어지는 동안, 관피아라는 새 말이 퍼질 만큼 관리들이 부패하고, 군대도 경찰도 사법부도 국회도 모두 엉망이다. 국민이 기댈만한 지도자도 없고, 상처받은 영혼을 어루만져 줄 큰 어른도 보이지 않는다.
고부의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기댈 지도자도, 어루만져 줄 어른도 없다면, 이제 우리 모두 오늘의 전봉준이 되어, 우리 자신을 개혁하고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도록 노력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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