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질경이 꽃대

푸르고운 2014. 9. 9. 21:57

지난 8월 마지막 금요일, 친구들과 지리산 노고단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섶에서 질경이를 보았다. 긴 꽃대가 잔자갈을 깐 길에까지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아련한 기억이 내 머릿속을 스쳤다. 어릴 적에 질경이 꽃대는 훌륭한 장난감이었다. 아이들은 질경이 꽃대를 뽑아 서로 걸어서 잡아당겨 잘리는 쪽이 지는 질경이 싸움을 했었다. 질경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두껍고 쇤 꽃대를 찾아내서, 미리 접힐 부분을 조금씩 휘어 질기게 만들어야 했다. 단련된 꽃대는 웬만큼 굵은 것도 쉽사리 잘라서 이길 수 있었다.

내가 질경이 싸움을 시작한 것은 내 바로 위, 3살 터울의 작은 형을 이겨보기 위해서였다. 아기 때에 전주 우량아 상을 받았던 형은 몸집이나 힘이 나와 비교할 수 없었다. 나는 입이 짧고 아들 막둥이여서 떼를 쓰느라 잘 먹지 않았고, 잔병치레가 잦았다. 그래서인지 키나 몸집이 또래 아이들보다도 더 작았다. 걸핏하면 때리고 넘어뜨리는 폭력에 속수무책이었던 내가 형을 이기는 수단으로 질경이 꽃대를 활용한 것이다. 덩치 큰 아이들은 조금 늦되는 경향이 있어서인지, 작은 형의 덩치는 내 두 배가 되었지만, 꾀를 쓰거나 말로 따지는 데는 내가 한 수 위였다. 나는 힘으로 이길 수 없는 형을 약 올리기 위해 질경이 싸움을 걸었다. 그리고 항상 미리 밭 가장자리나 풀밭을 뒤져, 단단하게 쇤 질경이 꽃대를 찾아 숨겨두었다. 질경이 싸움은 먼저 질경이 꽃대를 찾아 5개 정도 준비를 한 다음, 서로 걸어서 잘리는 쪽이 다시 새것을 걸어 5개가 다 잘리면 지는 놀이였다. 질긴 꽃대를 숨기고 있다가 몇 개 잘리고 난 뒤에, 슬그머니 질긴 꽃대를 꺼내 모두 잘라버리면 형은 씩씩거리며 뛰어 나가 새 꽃대를 가지고 왔다. 하지만 이미 밭을 다 뒤져서 질긴 것은 모두 뽑아 감추어 둔 날 이길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화가 난 형이 한 대 쥐어박으면 난 비명을 질러야 했지만, 아파서 울면서도 얼마나 통쾌했던지 모른다. 장난감이 없던 시절에 질경이는 좋은 놀이 재료였다.

6‧25 전쟁이 끝나고 전주 노송동 우리 집 골목을 따라 올라간 언덕 위에 감리교회가 생겼다. 서울에서 상당히 큰 교회의 담임이었던 윤 노인 목사님이 세운 교회였다. 피난을 내려왔다가, 서울의 교회가 폭격으로 파괴되어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임시로 교회를 만들었던 것이다. 전쟁 후에 모두 어렵던 시절이었지만, 그 교회에는 종이로 만든 커다란 둥근 통에 담긴 분유가 있었고, 미국의 구호물자를 신도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었다. 분유와 구호물자는 가난한 동네에서 많은 신자를 끌어들였다. 나도 당연히 그 교회 주일학교에 나갔다. 그런데 목사님의 외손자가 전주풍남초등학교 나와 같은 학년으로 편입되었다. 서울 말씨를 쓰며 제법 ‘서울 놈’티를 내는 녀석과 나는 늘 함께 학교를 오갔기 때문에 친해졌다. 지금도 기억하는 녀석의 이름은 목사님의 손자답게 김목민(金牧民)이었다. 구제물자 옷을 입고 매끄럽게 서울 말씨를 쓰며 꿈에도 못 본 장난감도 가진 녀석은, 내게 언제나 요즘 말로 ‘넘사벽’이었다. 뭔가 녀석을 이길 방법을 생각한 끝에 질경이를 써먹기로 했다. 서울 놈이 질경이 놀이를 알 턱이 없으니 요령을 가르치기만 하면 되었다. 가장 공정하게 질경이를 찾아서 게임을 하지만, 내게 숨어있는 내공(?)을 녀석이 알 턱이 없으니 승부는 언제나 내 마음대로였다. 장난감도 뺏고, 미제 과자도 쉽게 내 것이 되었다. 오래되지 않아 녀석도 눈치를 채고 질경이를 찾아내는 바람에 우리는 박빙의 승부를 했다. 그리고 둘이는 찰떡처럼 붙어 다녔다. 그러나 3학년이 될 즈음에 목민이는 서울로 돌아갔다.

질경이는 내게 버거운 상대들을 이기는 멋진 수단이었고 즐거움이었다. 목민이가 떠나고 우리 집도 교동으로 이사를 가면서 전주천을 놀이터로 삼은 뒤 질경이는 시시한 추억이 되어 버렸다. 살아있는 물고기와 참게, 맑은 물과 겨울 썰매가 있는 전주천에서 내 악동의 자질은 유감없이 자라고 멋지게(?) 풀렸다. 성장하면서 가끔 질경이를 보면 옛날 생각이 났고, 떠난 목민이가 지금은 아마 목사가 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감리교회 목사 명단을 찾아보기도 했지만 그런 이름은 없었다.

약사로 일하던 형은 여러 해 전에 심근경색으로 수술을 받고 건강이 나빠져 외부활동을 거의 접은 채 살고 있어 내가 서울로 찾아가야 만날 수 있다. 나도 환자를 돌보는 처지여서 그리운 마음뿐, 얼굴 보기도 추억을 나누기도 어렵다. 지나간 일들은 모두 즐겁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음을 헤아리면, 나도 이제 하릴없는 영감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연히 노고단 길에서 만난 질경이가 내 아련한 기억을 일깨워 밤 시간을 축내고 말았다. 창밖에는 빗소리가 잦아드는지, 내 귀가 어두워 잘 듣지 못하는지 모르지만, 이번 비가 개면 자전거를 타고 나가 질경이 꽃대를 뽑아 와서 요즘 날 귀찮게 하는 문 아무개라는 시골 영감과 한 번 겨루어 보아야겠다.

(2014. 09. 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