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4일 밤은 아주 유쾌하고 신 나고 감격스러운 밤이었다. 나는 그날 초저녁에 벅찬 감격을 누렸고, 그 뒤는 초조와 안타까움에 애간장을 태웠다. 그리고 자정을 넘긴 15일 새벽 1시쯤에 마침내 전율처럼 짜릿한 감동을 맛보았다. 말 그대로 사는 맛을 느낀 밤이었다.
그날 밤, 내 유쾌함의 출발은 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2014 아시아 축구연맹 16세 이하 챔피언십」의 8강전인 한국과 일본의 경기에서부터이다. A그룹 예선결과 우리나라가 3전 전승, 1위로 8강전에 진출하여 B그룹 2위인 일본과 그날 오후 5시 30분부터 경기를 벌였다. 예선리그에서 오만(Oman), 말레이시아, 태국을 꺾은 대표팀에는 이승우(16세. 스페인 바르셀로나 후베닐A)라는 걸출한 스타가 있었다. 그는 말레이시아와의 경기 때에 앞에 즐비한 수비수들을 조롱하듯 젖히고 정확하게 골문 구석에 차 넣어 결승골을 만들었고, 태국과의 경기에서는 두 명의 수비 사이로 볼을 장난하듯 감아 넘겨 통쾌하게 골을 터뜨렸다. 여태껏 우리나라 성인축구에서도 볼 수 없었던 기막힌 장면이 청소년 축구에서 나왔다. 이미 「작은 메시」라는 별명을 얻고 있는 그는 공격수에게 필요한 드리블, 패스, 슈팅능력이 뛰어난 데다 빠른 발까지 갖추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일본과의 경기가 시작되어 40분께까지는 일본이 강하게 압박을 하면서 한국은 좀처럼 경기를 풀어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41분께, 일본 진영에 짓쳐 들어가던 이승우가 볼을 왼쪽의 김정민에게 패스했다가 다시 받아 일본의 골네트를 흔들었다. 순간에 이루어진 패스와 되받아 차 넣은 골은 일본의 혼을 빼기에 충분했다. 이어서 후반전 시작 2분께, 한국진영에서 볼을 잡은 이승우는 수비수를 제쳐 볼을 차고 나갔다. 수비수 세 명은 그의 뒤를 따라갈 뿐, 파울을 해 볼 틈도 없이 골키퍼마저 제치고 가볍게 골문에 공을 밀어 넣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팀의 「메시」라는 세계 최고의 선수가 가끔 보여주었던, ‘60m 드리블 골’이라는 놀라운 능력이 우리의 어린 선수에게서 나왔다. 스페인의 한 매체는 그의 골을 ‘새로운 예술작품’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정말 소름 돋는 감동이 내 온몸에 짜릿하게 퍼졌다. 한국 축구가 목메게 기다렸던 공격수, 진정한 킬러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결과는 2대 0, 이승우의 발로 한국 팀은 내년 17세 이하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 참가 자격을 확보했고, 일본은 절망했다.
축구경기가 끝나고 또 하나의 경기가 내 관심 속에 진행되고 있었다. 미국 여자프로골프 대회 가운데 마지막 메이저 대회인 『2014 에비앙 챔피언십』이 프랑스 에비앙에서 열렸다. 그 대회에는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던 박인비, 최나연, 박세리, 김인경 등과 한국 랭킹 상위의 김효주, 장하나 등이 초청받아 출전했다. 9월 11일 첫날 김효주는 –10이라는 경이적인 스코어로 선두에 나섰다. 까다롭기로 이름난 에비앙 코스에서 10언더파의 기록을 낸 선수는 일찍이 없었다. 상금이 많고 코스가 까다롭게 설계되는 메이저대회에서 최고 기록이 9언더이다. 남자 프로골프의 메이저 대회에서도 없던 대 기록을 세운 것이다. 골프의 역사를 새로 쓴 자랑스러운 기록이었다. 12일과 13일에 김효주는 벌어놓은 타수를 1타씩 까먹어 마지막 날 8언더(1위)로 시작했다. 그린을 어렵게 만들어 모든 선수가 바람과 딱딱한 그린에 고전했기 때문에 2타가 줄었어도 선두였다.
나는 컴퓨터를 이용하여 방송을 보는 터라 골프 중계를 볼 수 없었다. 궁리 끝에 대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실시간 올라오는 성적을 보며 안타깝게 결과를 지켜보고 있었다. 전반 5홀까지 김효주가 1타를 줄여 9언더가 되었을 때, 경쟁 상대인 호주의 ‘카리 웨브’가 6언더까지 내려가고, 최나연과 허미정이 8언더까지 추격해 왔다. 그러나 미국에서 LPGA(미국 여자프로골프협회) 선수생활을 5년간 보장받을 기회가 주어지는 이 대회에 김효주가 우승하여 한국 선수의 명맥을 확실히 이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효주, 최나연, 허미정, 장하나까지 상위를 한국 선수가 차지하고 있던 행복한 시간도 잠시, 추격해오던 ‘카리 웨브’가 14와 15홀 ‘버디’로 11언더가 되었고, 김효주는 11언더에서 16홀 ‘보기’로 10언더가 되어 2위로 내려앉았다. 남은 홀은 17과 18홀, 17홀은 지키는 홀이고, 18홀에서 ‘버디’를 해서 동점으로 연장전을 치르는 것이 최선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이미 골프 명예의 전당에 들어있는 백전노장, 거의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착잡한 마음에 1번 모니터의 TV 채널을 돌리다가 MBC에 채널을 맞추니 에비앙 골프 중계를 하고 있었다. 홈페이지의 리더 보드를 보며 애달던 내 마음을 헤아린 듯, 자정부터 중계방송을 시작한 것이다. 17번 홀에서 ‘카리 웨브’와 김효주 모두 ‘파’로 마치고 18홀이다. 티샷은 김효주가 조금 멀리 나가 ‘카리 웨브’가 먼저 두 번째 샷을 했다. 그녀의 샷은 그린을 약간 벗어나 높은 쪽 가장자리에 놓였다. 김효주의 샷은 멋지게 그린으로 올라가 핀 앞 4.5m에 안착했다. 거기서 이변의 징조가 시작되었다. ‘카리 웨브’가 웨지로 가만히 그린 안으로 보낸 공은 내리막을 굴러 핀에서 4m 정도 거리에 섰다. 이번엔 김효주의 ‘버디’ 퍼트 차례, 들어가면 11언더파가 되어 ‘카리 웨브’를 위협하게 된다. 제발 들어가라! 절로 두 손을 맞잡고, 간절한 마음이 되었다. 효주는 4.5m의 휘어진 경사 퍼트인데, 전혀 동요되지 않고 침착하게 공을 굴린다. 비켜갈 듯 내려가던 공은 스르르 휘어 홀컵에 빨려 들어가듯 자취를 감추었다. 그 순간, 퍼트를 바라보던 ‘카리 웨브’의 얼굴에 당황과 좌절의 표정이 스쳐 갔다. 두 선수가 동점이 되었지만 ‘카리 웨브’는 4m의 어려운 퍼트를 남겨놓고 있었다. 그리고 .카리 웨브‘는 ‘파’ 퍼트를 실패했다. 효주의 얼굴은 덤덤했다. 김효주 11언더파 우승, ‘카리 웨브’ 10언더파 2위, 허미정·장하나 9언더파 공동 3위, 최나연 8언더파 5위, 15일 새벽 1시경에 또 하나의 스포츠 역사가 기록됐다.
그날 밤, 축구와 골프에서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들을 영접했다. 이미 널리 알려진 청소년들이지만 그들의 진정한 능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확실한 스트라이커가 없던 우리 축구에서 이승우는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이어서 준결승과 결승에서도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하여 우승하기 바란다. 여자골프는 이미 최강의 위치를 누려왔고, 김효주가 그 역사에 또 하나의 획을 그었다는 의미가 있다. 요즘 스포츠는 한심한 정치 행태에 실망한 국민들을 달래주는 정신적 피난처이다. 국민을 무감각으로 유도하는 우민화(愚民化) 수단으로 스포츠를 이용한다고 하지만, 그나마도 없으면 어찌하나 싶다.
나이 들어 자전거와 등산으로 몸을 단련해 누구보다 건강하고, 스포츠 등 다양한 취미가 있어 심심하지 않다. 고교동창들과 매일 만나 식사한 뒤 오후 시간을 즐겁게 보내고, 수필을 쓰면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신기하다. 요양병원의 아내도 몸 상태가 좋아 나름 편안한 듯 보인다. 나 혼자 사는 불편함이야 감내해야 할 인생과제다. 이만하면 나도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가끔 이번처럼 우리 젊은이들이 희망을 안겨준다면, 내 노년이 더욱 즐거워지리라. 노인들이여, 웅숭그리지 말자. 모르는 세계에 대해 두려움을 떨치고 배우며 즐기자. 살날은 많고 배울 것, 즐길 것도 많다. (14.09.15)
*
웅숭그리다 : 춥거나 두려워 궁상맞게 몹시 웅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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