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길을 갈 때, 될 수 있으면 골목길로 다닌다. 자동차의 소음과 위험을 피하는 뜻도 있지만, 골목길이 주는 가 좋아서이다. 골목길에는 큰길에 없는 낭만이 있고 드러나지 않지만, 사람 사는 인정이 내 몸에 스며들어 포근하다. 내 골목길에는 몇 날 밤을 새우며 이야기할 만큼의 추억들이 숨어 있다.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은 ‘’을 좋아하지만, 군자가 못 된 나는 그저 ‘’이 좋다. 지난날처럼 나무판자나 생나무 울타리가 아닌 시멘트 담장이라 삭막하지만, 그래도 담 넘어 뻗은 감나무·대추나무·석류나무가 있어 조금은 위안이 된다.
오늘은 감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가을이 되어 골목길을 가다 보면, 붉게 익어 떨어진 감이 시멘트 바닥에 터져 널려있다. 그걸 보면 퍽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가끔 낮은 데서 떨어져 거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감을 보면 추억이 생각나 주워서 먹어보고 싶을 때도 있다. 가을에 산을 오르다가, 익어 떨어진 감을 만나면 나는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엊그제 자전거를 타고 아내를 보러 요양병원을 가느라 평화동 덕적골 골목을 지나가다가 골목길에 얌전하게 떨어져 있는 감을 만났다. 순간, 타이어에서 끼익 소리가 나도록 자전거를 멈추었다. 골목길에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얼른 감을 집어 들어 후후 불어 모래를 털고, 반을 쪼개 입에 넣었다. 햐, 바로 그 맛, 어릴 적에 새벽마다 먹던 그 감 맛이 입안에 퍼졌다. 완전한 맛이 아닌, 벌레가 감 꼭지 부분을 파먹어 떨어진 감의 맛이 제대로 났다. 그 감은 달기는 덜 하지만, 추억의 맛이 숨어있는, 바로 그 어린 시절 양철지붕 위의 감 맛이었다.
그러다가, 추억의 감 맛에 황홀하던 내 시선이 저만치 서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어린 여학생들의 시선과 마주쳤다. 아주 측은하다는 표정, 그리고 불결한 것을 본 듯 일그러진 입술 모양이 두 여학생의 표정에 넘치고 있었다. 순간, 나름대로 추억에 황홀해 하던 내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는 느낌이 지나갔다. 아이들이 보기에는, 요즘 거지도 그런 걸 주워 먹지 않을 것인데, 멀쩡한 노인네가 뻔 나는 자전거랑 타고 다니며, 떨어진 감을 주워 먹으니,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아이들은 내가 감을 주워 들여다보는 즈음에 골목을 돌아오다가 날 본 것이다. 추억놀이를 하다가 망신을 한 셈이다. 생각들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면서, 얼굴이 붉어지기보다는 바로 배짱이 나왔다.
“야, 맛있네, 니들도 먹어볼래?” 하며 남은 반쪽을 아이들에게 내밀었다.
“엄마,” 기겁을 하며 아이들이 저만치 달아나는 사이에 나는 감 반쪽을 입에 넣고 얼른 페달을 밟아 병원으로 향했다. 반쪽의 감 맛은 아까 먹던 맛과 조금 다른 듯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말께 전주시 교동으로 이사해서 이듬해 여름부터, 감은 내 일등 군입정 거리가 되었다. 우리 집은 서쪽 지붕에 잇대어 함석으로 헛간을 만들었었다. 함석지붕의 끝에는 물받이를 만들어 물이 담벼락을 적시지 않게 했다. 기와를 얹은 흙담 옆에는 옆집의 아름드리 감나무가 서 있어, 가지가 양쪽 집에 나뉘어 뻗어 있었다. 전주 인 서낭댕이 파라시(八月柿라고도 함)와 같은 종류인 그 감은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벌레 먹은 감부터 떨어지기 시작했다. 함석지붕에 감이 떨어지는 소리가 제법 요란했고, 그 소리만으로 익은 감인지 땡감인지 구분할 수 있었다. 땡감은 단단하므로 날카로운 소리가 나면서 함석지붕에서 튀어 다시 한 번 작은 소리가 난 뒤에 굴렀다. 반면, 익은 감은 소리가 연하고 털썩하는 느낌이 든 다음 돌돌 굴러 물받이 홈에 덜그럭, 하고 걸렸다. 작은 형은 텅, 하고 떨어지는 소리만 나면 뛰어 나가 물받이를 뒤졌지만, 나는 익은 감이 떨어질 때만 달려갔다. 그리고 아침잠이 많은 형은, 내가 희뿌연 새벽에 살그머니 올라가 밤새 떨어진 감들 가운데 잘 익은 것만 골라 숨겨놓은 뒤에야 일어나, 덜 무른 감을 주워오며 ‘재수 없다’고 투덜댔다.
옛날 추석 무렵이면, 진안사거리라 부르던 지금의 전주고와 풍남초등학교 사거리에 좌판을 벌여 파라시를 파는 노인들이 많았다. 파라시는 감의 크기가 작고 납작한데, 만큼 물이 많지는 않았지만, 쪽 빨면 한입에 들어오는 맛있는 감이었다. 어렸을 때의 입맛이어서 인지 모르지만, 파라시는 임실의 청웅 수시를 제외하고 내가 먹어본 감 중에서 제일 맛이 있었다. 달기만 한 게 아니라 입에 느껴지는 감칠맛이 일품이었다.
그날, 우연히 골목길에 떨어진 감을 주워 추억을 음미하다가 창피를 당했지만, 그래도 그 감 맛은 상가에서 파는 어떤 감 맛보다 좋았다. 그 맛은 내 아름다운 시절의 짜릿한 추억이 잘 비벼진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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