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미에 파묻혀 잠들 수 있기를….
장미꽃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흔든 꽃이 또 있을까? 장미처럼 수많은 문학작품 속에 등장한 꽃이 또 있을까? 장미만큼 젊은이의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낸 꽃이 있을까?
장미꽃은 사랑이고 열정이며 눈물이다. 장미는 꺾으면 곧 시든다. 화병에 꽂아도 사흘을 버티지 못한다. 장미는 핀 그대로 두고 보아야 오래 아름답다. 장미꽃을 꺾어 내 것으로 소유하려는 생각은 어리석다. 장미는 꺾이는 일이 싫어서 날카로운 가시를 지니고 있다. 장미의 가시는 “날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라는 메시지이다. 장미는 꺾이는 순간 배신을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5월의 마지막 월요일, 석가탄신일이기도 한 오늘, 꽃밭정이 수필문학회 회원들은 전남 곡성과 남원시 사매면의 혼불문학관을 보러 때 늦은 ‘봄 문학기행’을 떠났다. 곡성 구 역사(驛舍)에서 열리는 장미축제를 보기 위해 초여름처럼 더운 늦봄까지 기다렸다. 여행은 언제나 설레고 즐겁지만, 천여 종류의 장미가 피어있다는 장미축제를 기대하는 내 마음은 남달랐다. 한 송이 장미꽃이면 토라진 마음이 쉽게 풀려 감동하고, 길을 가다가도 담 넘어 핀 덩굴장미에 정신을 뺏기던 그녀, 지금은 홀로 병상에 누워 차츰 다가서는 삶의 끝자락을 밀쳐내느라 안간힘을 다하는 아내에게 수십만 송이의 장미를 그림으로나마 보여주고 싶었다.
철길이 쉬고 있는 곡성역에는 추억과 그리움이, 사랑과 즐거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낡은 기관차와 작고 초라한 역사, 어릴 적에 철길에서 기차에 못을 납작하게 갈려 숫돌에 갈아 작은 칼을 만들었던 일, 전주(全州) 각시 바위 서방 바위에 목욕하러 가면서 철길 위로 누가 오랫동안 가나 겨루던 추억들, 그런 아름다운 추억들이 좁은 레일위에 살아 있었다. 가족 셀카를 찍느라 “치-즈”를 외치는 사람, 지팡이 아이스크림과 솜사탕을 두 손에 나눠 쥐고 번갈아 먹으며 환호하는 아이들, 유모차에 앉아 “까르륵” 웃음 짓는 아기의 눈동자에도 장미는 피어 있었다.
장미는 이름만으로도 설레는 꽃이다. 좁다란 통로를 빼곤 온통 장미로 뒤덮인 언덕, 글로 적어낼 수 없는 황홀한 향기와 세상의 모든 색을 쏟아 부은 갖가지 색의 장미에 나는 그저 무릎을 꿇어 찬사를 바칠 수밖에 없었다. 장미는 그들의 고향 유럽에서 미인들과 여왕, 왕비, 공주들의 사랑을 받았다. 어떻게든 새롭고 아름다운 장미를 만들어 그녀들의 환심을 사고자 했던 그 흔적들이 곡성역의 장미원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지금은 흙으로 돌아간 그녀들의 이름이 장미의 이름으로 남아 아름답게 빛나는 거대한 화원에 나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날았다. ‘마리 앙투아네트, 엘리자베스 ……등등’ 그녀들의 꽃 입술을 더듬으며 한없이 날고 싶었다. 온 세상의 향기와 기쁨과 사랑이 넘쳐나는 언덕, 장미의 나라에는 다툼도 미움도 시샘도 없었다. 아이도 어른도 노인도 장미를 보는 눈은 평화로웠고 사랑으로 가득 찼다. 가족과 이웃, 연인들과 친구들이 장미의 향기에 너그러워지고 사랑으로 승화되어 태우듯 내리쬐는 태양에도 주눅 들지 않아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을 휴대전화에 담으면서 나도 덩달아 행복했다.
순결한 신부의 드레스처럼 아련히 속살이 비치는 듯한 흰색에 꽃잎 가장자리가 연한 분홍색으로 물든 장미, 시인의 가슴에 일렁이는 잉걸불처럼 타오르는 붉은 장미, 한없이 태워버리고 싶은 짙은 열정으로 빛나는 검붉은 꽃, 수줍게 첫사랑을 고백한다는 주황색 장미, 질투와 식은 사랑의 꽃말을 지닌 노란 장미……. 장미 나라의 이야기는 곱고, 향기로 가득했다. 아름다운 장미가 날카로운 가시를 숨긴 까닭은 사랑의 처연함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가시를 내밀어 함부로 사랑에 빠지지 않도록 염려하는 마음이 숨어있다. 쉽게 아름다움에 빠져들면 헤어나지 못하고 나중에 깊은 슬픔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하는 마음일 터이다.
꽃의 여왕이라는 장미는 눈으로 보여주는 아름다움에 더하여 짙고 황홀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가장 많이 이용되어온 향수의 재료다. 가장 향기로운 장미 향수는 불가리아 북부 발칸산맥에서 자라는 장미에서 나온다고 한다. 장미의 향기는 시간에 따라 강약이 달라지는데, 가장 추운 겨울날 자정부터 새벽 2시 사이에 가장 강한 향기를 내뿜는다고 한다. 사람들은 밤 10시에서 새벽 2시 사이에 잠을 자야 피로가 제대로 풀린다고 하는데, 장미도 아마 그 시간에 지닌 향기를 내뿜고 휴식에 들어가는지도 모른다. 장미향을 뽑아내는 사람들은 그 시간을 놓치지 않고 기다렸다가 장미꽃을 따서 장미 향수를 만든다. 화학적으로 만든 향수는 잠시 남아 있다가 없어지지만, 장미 향수는 조금만 뿌려도 보름 넘도록 향기가 남고 향이 짙다. 지금도 세계 최고의 향수는 평가하는 사람들의 호불호(好不好)에 따라 이견이 있지만, 장미향을 기반으로 조향(調香)된 ‘프리데릭 말’ 등이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장미의 꽃말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그 꽃송이를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을 하고 있다고 한다. 붉은 장미를 다발로 전하는 것은 ‘비밀스러운 사랑’을 뜻하고, 붉은 장미에 안개꽃을 곁들여 주면 ‘오늘 밤은 그냥 보낼 수 없어요.’라는 뜻이라고 한다. 붉은 장미 세 송이는 ‘당신을 사랑해요’, 하얀 장미 봉오리 다발은 ‘나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에요.’, 하얀 장미 한 송이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라고 한다. 재미있는 것을 소개하면 붉은 장미 119송이는 ‘나의 불타는 가슴에 물을 뿌려주세요’이고, 노란 장미 24송이는 ‘제발 내 앞에서 사라져 줘’라고 한다. 나는 가끔 요양병원의 아내에게 가다가 길가의 덩굴장미 한두 송이를 주머니칼로 잘라 가지고 가서 병상의 아내에게 보여주면, 말을 할 수 없고 움직이지 못하는 그녀는 눈이 커지면서 콧등에 주름이 잡히도록 얼굴을 찡그린다. 꽃을 가져와 좋고 고맙다는 뜻이다. 내일은 그녀에게 내가 곡성에서 찍은 장미 사진
을 보여주고, 장미 세 송이를 주며 꽃말도 일러주어야겠다.
온 세상을 뒤덮은 듯 고운 장미 동산에는 장미향과 젊은 여인의 짙은 체취와 어린 아기의 비릿한 젓 내음이 섞여 나를 취하게 하고 어지럽게 했다. 그 어지러운 행복 속에서 그저 언제까지 머물고 싶었다. 장미가 만들어주는 오색의 향기와 미소와 사랑은 거기 모인 모두에게 치유의 기적을 베풀고 있었다. 내년에는 자전거를 타고 곡성에 가서 조금 일찍 장미원에 찾아가 피어오르는 꽃들에서 사랑과 향기를 배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 장미꽃에 묻혀 그 향기 속에서 잠들고 싶다.
(2015.5.25.)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못 준다고 전해라 (0) | 2016.01.19 |
|---|---|
| 장갑 속의 그녀 (0) | 2016.01.19 |
| 한 사내와 여섯 마누라 (0) | 2016.01.19 |
| 나랏말씀이.... (0) | 2015.05.28 |
| 취, 그 농염한 여인/수필 (0) | 2015.05.09 |